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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습격 문화제국주의 | | | | 문화제국주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거대 기업들이 문화생산양식을 통제함으로써 세계경제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문화기획에서는 ‘문화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두 두 번의 기획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싣는 순서 - 문화제국주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 현대사회 문화제국주의 모습
이남표 / 홍익대 강사
‘문화제국주의’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자신의 정칟경제적 지배력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로 확대시키려는 침략주의를 말한다.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는 실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말 영국 신문 <데일리뉴스>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적 침략을 통한 영토와 지배력 확장을 일반적으로 뜻했던 제국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엄밀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1916년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란 저서를 통해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필연적인 정치경제적 구조로 제국주의를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의 본질은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자기팽창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장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낳고, 승자는 자연스럽게 독점을 통해 보다 높은 이윤을 확보한다. 이 독점자본은 지속적인 초과이윤 확보와 스스로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국경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따라서 값싼 원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소비재 상품의 안정적인 시장을 마련하기 위한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안으로 군사적 침략을 통한 식민지 지배와 이를 둘러싼 열강들 사이의 전쟁이 이어지게 된다.
맥도날드의 침략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전 식민지 국가들의 대다수가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정치적 독립이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군사적 침략을 통한 직접적인 정칟경제적 지배는 여의치 않게 되었다. 독점자본은 새로운 계기와 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일제가 우리 민족의 거센 독립운동에 위협을 느껴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부드러운 문화통치로 바꾼 것과도 같다. 문화란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자 그것들이 사회의 각 영역을 가로지르며 서로 경쟁하는 장’이다. 삶의 방식들을 지배할 수 있다면, 굳이 군사적 위협과 정치적 억압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지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점자본에서 찾아냈다. 맥도날드 햄버거, 나이키 운동화, 스타벅스 커피, 메이저리그 야구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이 새로운 제국주의의 군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제국 군대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6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안에서는 언론학자 쉴러가 1969년 <매스커뮤니케이션과 아메리칸 제국>이란 저서를 통해서 문화제국주의의 실상을 고발했다. 벨기에 사회학자 마틀라르와 칠레의 저술가 도르프만은 1975년 라틴아메리카의 정칟문화적 삶에 대한 미국의 교묘하고 부당한 개입과 조작을 비판하는 연구인 <어떻게 도날드 덕을 읽을 것인가>를 출간했다. 이들의 연구는 50년대와 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종속이론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제국주의 이론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을 통한 해외시장의 확대와 그로 인한 제3세계의 저발전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반면, 문화제국주의 이론은 경제적 착취의 배후에 놓인 문화적·이데올로기적 권력의 효과에도 주목한다. 문화제국주의의 모습을 턴스톨은 “세계 도처에서 지역문화가 미국의 경박한 상품들과 매스미디어 생산물들의 무차별적인 대량판매에 의해 파괴되고 소멸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톰린슨은 문화제국주의를 말하는 이들이 모두 똑같은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제국주의는 네 가지 방식으로 구성된다. 문화제국주의를 바라보는 네가지 방식
첫째, 문화제국주의는 미디어제국주의이다. 미디어제국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미디어 소유와 운영에 관련된 문제, 다시 말해 미디어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 방식 및 그에 따른 미디어복합기업의 세계 시장 지배를 문제 삼는다. 아울러, 미디어제국주의는 이러한 시장 지배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추적한다. 전자는 주로 정치경제학적 설명이, 후자는 문화연구의 이론들이 동원된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을 어떤 거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떻게 문화의 다양성과 공정경쟁이 질식당하고 있는가, 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건전한 권선징악 교훈이 실은 어떻게 계급갈등, 제3세계, 인종 및 성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가 등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문화제국주의를 국민담론의 문제로 바라보는 방식이 있다. 선진국 특히 미국의 문화가 각국의 토착문화를 위협하여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턴스톨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지적은 이러한 시각의 하나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우리의 전통적 식단을 위협하는 현상도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대규모 운동으로는 UNESCO의 “새로운 세계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질서(NWICO)” 요구 선언을 들 수 있다. 인류의 2/3를 차지하는 제3세계 국가들은 70년대 초에 비동맹 정상회의를 통해 국제적인 정보의 불평등과 왜곡된 흐름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76년 튀니지 심포지엄에서 세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대다수를 선진국들이 독점함에 따라서 비동맹 국가들의 현실이 왜곡되어 유통된다고 비판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계의 거대한 다국적 언론기구가 정보를 지배·조작함으로써 세계의 정보가 몇몇 국가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면에 다른 국가들은 무시하는 불균형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고 정보의 탈식민화를 성취하여 새로운 국제 정보 질서를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문화제국주의를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는 흐름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국과 같은 개별 국가의 횡포를 비판하기보다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주로 네오맑스주의자들이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본주의의 확산이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걸쳐서 균질적인 소비자 중심주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다국적 기업의 부드러운 경제적 강제가 작동한다고 본다. 그와 같은 문화는 모든 경험의 상품화에 다름 아니기에 인간의 질적 가치를 훼손하며, 나아가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소수와 영원히 빈곤에 허덕이는 다수를 확대재생산한다고 공격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제국주의를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서구 중심의 계몽 기획과 합리성에 대한 찬양이 가져올 파괴적 영향을 지적하는 탈근대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문화제국주의가 이른바 ‘문화적 상대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지만 여러 문화제국주의 이론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국적 기업의 외피를 쓴 세계금융자본과 미디어복합기업들이 경제적·문화적 불평등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잘 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격차, 특정 국가 내에서 잘사는 계층과 못사는 계층 사이의 구별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언론학자 프레데릭에 따르면 제1세계의 사람들은 세계 인구의 단지 1/4를 구성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 총수입의 절반을 통제한다. 세계 인구 중에서 가장 가난한 1/5은 전 세계 GNP의 단지 2%만을 벌어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격차는 30년 전보다 두 배나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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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spiderlily | 2008/12/19 13:31 | etc
| 지식 창고 | 2004/08/09 (월) 19:08 | | |
I. 1992년의 『외국문학』에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 처음으로 소개된 후 지난 10년 동안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과히 낯설지 않은 연구분야가 되었다. 이제는 영문학 뿐 아니라, 영화비평, 인류학, 사회학 등 적지 않은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탈식민페미니즘 담론에서 탈식민주의와의 관계를 뺄 수 없다.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는 억압적 지배 사회 속에서 주변화되어온 '타자들'을 복원하는 것을 공통 목표로 삼아 왔다. 이들은 주체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전제를 수용하면서, 흑/백, 남/녀의 이분법적 대립에 저항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탈식민주의는 젠더 문제를 도외시해왔다는 비판을 적지않게 받아왔다. 탈식민주의 논의의 대표적 개념인 호미 바바(Homi Bhabha)의 "잡종성" 개념에서조차도, 인종만 강조될 뿐, 젠더 문제는 논외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제3 세계를 대변하고자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입을 모아 탈식민주의를 공박하는 부분이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이나 트린 티 민하(Trin T Minh) 그리고 찬드라 모핸티(Chandra Mohanty) 등의 미국의 대표적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들은 젠더 문제를 논외시하는 기존의 탈식민주의 논의로는 제3 세계 여성이 겪는 이중 식민화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탈식민주의 논의 속에서 제3 세계 토착 여성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토착 및 외래의 가부장제 양자 모두에게 잊혀진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탈식민주의를 페미니즘화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탈식민주의는 인종과 민족의 차이 뿐 만 아니라 성차로 인해 역사에서 잊혀진, 그리고 지금도 잊혀지고 있는 타자들을 복원하고자 시도할 때, 다층적 주체를 찾을 수 있을 뿐 더러 대항적 실천 사유체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주요 특성이 탈식민주의의 페미니즘화라면, 또 하나의 특성은 페미니즘의 탈식민화이다.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즘이 서구 부르주아 백인 여성을 위한 이론일 뿐, 흑인이나 제 3세계 여성주체와 무관하다고 본다. 따라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서구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부터의 탈식민화를 기도한다. 영미 여성중심비평(gynocriticism)이 남성 가부장적 휴머니즘에 공모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이나 엘렌 식수(Helen Cixous) 그리고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불란서의 대표적 페미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여성적 글쓰기"가 인종과 계급이 각기 다른 제3세계 여성들의 구체적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고 여성 주체성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할 위험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점은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주요 논점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이 비판받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비판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받는 비판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탈식민주의는 해체주의와 탈구조주의와의 연계에서 이론화한 나머지, 전지구적 관심사와는 거리가 벌어져 있다고 비판받아왔다. 이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대표주자의 하나인 아이자즈 아마드(Aijaz Ahmad)는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단지 제1세계, 말하자면, 미국 "중심부의 대학에 자리잡은 급진화된 이민자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대부분이 모국에서 상류층 출신들로서, 사회주의적 실천에 선행하는 정치적 기초가 결여된 채, 직업적인 야심만을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드의 탈식민주의 비판은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들에게도 향할 수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 이론가의 상당수가 영국과 미국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3 세계 출신 교수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들의 상황이 과연 제3 세계의 현실과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이론과 실천의 연계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이들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들은 공동분모를 가지면서도 각기 차이를 둔 대답을 모색한다. 그 대표적 주자들로, 바로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3 세계 출신의 여성 학자들, 가야트리 스피박, 트린 티 민하, 찬드라 모한티, 사라 술레리(Sara Suleri), 케투 카트락(Ketu Katrak)등이 거론될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의 논의에서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주요 쟁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발표에서는 우선 스피박의 "말걸기" 개념과 이들 페미니스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문학적 실천의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미국 에스닉 여성 문학의 재현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II.
주요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라면 그 누구보다도 가야트리 스피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을 탈식민화시킨 것에 있다. 말하자면 서구 중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제3세계의 토착여성의 삶을 진정으로 재현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서구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스피박이 제기하는 기본 비판은 서구 페미니즘의 제3 세계 여성의 이해와 재현은 진정한 말걸기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제3 세계 토착 여성들의 구체적 삶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들과의 진정한 대화에도 바탕을 두지 못한 채 서구 페미니스트 자신들의 유아론적 재현의 특권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말걸기" 없이는 제1 세계 여성의 공감과 지성만으로 제3 세계 여성을 논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들 페미니스트들이 재현하려하는 침묵하는 제3 세계 여성 일반은 글쓰기의 대상이 될 뿐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그들, 제3 세계 여성이 아니라 서구 페미니스트 자신의 정체성이며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그녀 자신의 재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크리스테바의 「중국여성에 관하여」라는 글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전혀 다른 정치 사회적 상황에 프랑스의 고급 페미니즘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된다. 이 예를 통해서 스피박은 미지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갖지 못한 채, 혹시라도 자신의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조차 없이 다른 세계의 여성들을 단순한 분석 대상으로 물화시키는, 일군의 제1 세계 여성 학자들을 비판한다. 탈식민주의페미니즘(스피박은 '국제적 페미니즘'으로 표현함)을 제대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정치 문화적 맥락 속에 프랑스 페미니즘을 적용시키기보다는, 반대로 서구 유럽의 맥락 속에서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피박은 문학적, 철학적 아방가르드로서 프랑스 페미니즘이 지닌 전복적, 혁명적 잠재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프랑스 페미니즘은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고, 너무나 수사적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 페미니즘은 실제 여성 속에서가 아니라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전통 속에서 담론을 발견하며, 기껏해야 기존의 담론을 전복하는 작품을 찬양하는 일이 전부라고 비판한다. 또한 프랑스의 최근 이론가들인, 데리다, 라캉, 료타르 등의 이론에 상당 부분을 의지하면서 주류 프랑스 전통의 해체를 모색하는 프랑스 페미니즘의 여성 담론 찾기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여성의 정체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주장이다. 물론 스피박이 프랑스 페미니즘을 전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과 서로 만나게 하는 읽기를 시도한다. 말하자면, 변화하는 복수적 주체를 상상하는 엘렌 식수에게서 스피박은 다양한 여성 주체를 모색하는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만 서구 중심의 페미니즘이 제3 세계의 구체적 지역성과 역사성을 단순히 수사적 차원으로만 이용한다면, "보편화"라는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내의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해서 스피박이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라고 지적한 비판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내의 에스닉 그룹을 정보제공자(native informant)로 이용할 경우 제3세계에 대한 그릇된 정보나 오해를 얻을 수 있는 소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주요 쟁점의 하나로 포스트맑시스트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로서 스피박이 제기하는 '하위주체로서의 여성' 개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하위주체 개념의 출발점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였지만 스피박은 이를 성, 인종, 문화적으로 주변부에 속하는 제3세계로 확장시켜 흑인/제3세계 여성을 '하위주체'로 개념화하였다. 스피박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침묵을 강요당해온 소위 제3 세계적 위치에 처한 여성 하위주체의 재현문제와 이를 위해 지식인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있다. 따라서 스피박의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잘 알려진 논문「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로 옮겨간다. 요컨대, 이 논문의 제목인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부정적 함의를 지닌 것으로, 그만큼 성, 계급, 인종적인 측면에서 몇 중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경험은 이해되고 재현하기가 힘들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스피박의 '하위층' 개념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생산양식과 여성착취의 관계를 문제화시키는 개념이 된다. 말하자면, 스피박은 다층적인 현 세계 상황에 적절한 하위층 개념을 제3세계 여성에게 적용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몸과 노동의 착취를 문제삼는다. 이 같은 시도의 대표적 예가 스피박의 저 유명한 인도 '사티' 분석이다. 스피박은 국제적 노동분업체계 속에서 제3세계 여성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다시 수정하고 확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토대를 이루면서도 보이지 않는 제3세계 여성노동을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가사노동과 육아를 둘러싼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과 몸의 문제 틀을 끌어안는 노동 개념이 필요하다. '하위주체'는 바로 이렇게 확장된 노동개념을 주체와 연결시킨 개념이다.
그러면 누가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경험을 재현해야하는가? 스피박의 대답은 지식인 여성인 듯 하다. 그러나 비록 지식인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 사회의 특권을 누려온 남성의 시각에 침윤되어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지식인 여성이 무조건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대표성을 가질 수는 없다. 여기에서 지식인 여성에게 윤리적 책무를 묻는 스피박의 말걸기 개념의 실천적 측면이 부각된다. 말하자면, 구체적 역사와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를 주체로 인지하는 진정한 '말걸기'를 통해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이 재현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말걸기를 통해 하위주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것을 담론과 문화영역으로 제대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의 말 걸기 개념은 요즘처럼 복잡한 다중의 망으로 얽혀있는 다국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현실성 있는 개념이며 바로 이 점에서 흑인이나 제3세계 여성주체가 스스로를 재현할 수 있는 것처럼 이론을 전개시키는 포스트 모던적 담론 혹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하위층 여성의 의식과 삶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여성은 엘리트주의나 대상화 경향을 경계해야한다. 그럴 때만이 하위층 여성들이 역사의 주체로 이해되고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체가 바로 단일 민족신화에 기초한 우리의 고정된 가부장제적 주체가 아닌, 성과 계급, 인종, 그리고 지역을 포함한 다층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전지구적 인식을 함께 하는 융합적이고 복수적인, 책임 있는 주체가 된다. 탈식민주의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사이의 괴리는 제3 세계 출신의 제1 세계 이산민 페미니스트의 한계로 종종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발표자를 포함한 한국의 영문학자들에게도 이 같은 지적은 해당될 것이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국내에서 주로 영문학계의 여성학자들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하위주체에 대한 '말걸기' 작업은 오히려 인류학이나 사회학 쪽에서 실제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 연구자 중에는 제주도에서 4.3사건을 겪은 제주 토착여성에게 "말걸기" 작업을 시도하여 이들의 내러티브를 재현하는 시도가 계속해서 추진된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재직하는 한국계 미국인 교수들과 강사들의 글 12편으로 엮어진 『위험한 여성』은 '외부의 눈'을 통해 한국의 젠더와 국가 관계를 '탈 자연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며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페미니즘의 진정한 말걸기의 한 실천으로서 무엇보다도 일본군 위안부 보상운동을 거론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차별의 관점보다는 "민족의 치욕"으로 해석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왔다. 한일수교는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여성들을 배제시킨 채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담론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전개된 위안부 보상 운동은 피해 당사자에 대한 여성 지식인들의 말걸기의 한 실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여성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귀속시키지 않고 국가와 젠더의 탈자연화를 인식하는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의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III.
지난 10여년 간의 탈식민주의 이론의 실천적 측면은 미국내 에스닉 문학의 번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양자는 어느 쪽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를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문화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적지 않은 에스닉 여성문학은 미국의 주류문화와 에스닉 문화 사이에서 다층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면에서 탈식민주의페미니즘과 동일한 목적을 지닌다. 지난 20년간 영미 정전을 제치고 미국 강단에서 가장 많이 교재로 채택된 중국계 미국인 작가 맥신 홍 킹스턴(Maxine Hong Kingston)의 『여인무사』(Woman Warrior)와 아프로 아메리칸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빌러비드』(Beloved) 는 바로 그러한 에스닉 여성문학의 대표적 예가 된다. 이들 문학은 제1 세계라는 미국 속에 제3세계의 공존을 확인시킬 뿐 만 아니라 그 틈새 속에서 또 다른 차이를 보이는 제3세계적 여성공간과 시간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인지하는 역사성과 인종의식, 그리고 국가의식은 제3세계적 시각과 탈식민주의 시각과도 차이를 보여주는 글쓰기를 지향한다. 이들은 미국내의 주류 백인의 동질적 역사관이나 벤야민의 표현대로 "동질적이고 공허한" 근대민족의 시간관 속에서 억압되었던 이질적 시간성과 틈새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회복하는 것을 여성적 글쓰기의 역할로 보고 있다. 이것이 이들의 글쓰기가 종종 새로운 역사 쓰기로 비유되는 이유가 된다. 이들의 글쓰기는 같은 에스닉 집단의 남성 비평가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왔는데, 그 이유의 근저에는 이들이 재현하는 자신의 에스닉 집단의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관점과 여성간에 탈자연화가 시도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킹스턴의 경우, 중국과 중국계 미국인의 상황을 정확하게 재현하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 그녀가 서술하는 중국신화나 고전들이 백인독자의 기호에 맞게 도용되고 왜곡된 것이 아닌가하는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변인으로서의 중국계 여성이자 남성 중심의 중국 사회의 주변인인 딸의 관점에서 종종 서술되는 킹스턴의 소설 속에서 중국 사회는 기존과는 다르게 재현된다. 말하자면, 킹스턴은 자신의 배경인 중국문화의 본질(essence)과 기원(origin)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실체(substance)와 구성(construction)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고 보아야한다. 즉 중국 본토나 미국내 중국 에스닉의 문화와 문학의 실체를 인정하되 거기에서 본질을 추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실체가 미국을 이루고 있는 실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문학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 점에서 킹스턴의 소설 속에서 중국의 신화는 필연적으로 재구성되고 재맥락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적지 않은 탈식민주의페미니스트들이 에스닉 여성의 체험에 근거한 자전적 글을 통해 서구의 차별주의 철학에 근거하지 않은 진정한 차이를 드러낼 것을 주장한다. 맥신 홍 킹스턴(Maxine Hong Kingston)이나 마몬 실코(Marmon Silko)의 글을 인용하면서, 트린 티 민하(Trin T Minha)는 체험에 근거한 이들의 글쓰기가 역사에서 배제되어온 사실들을 말하는 형식의 글쓰기임을 지적한다. 이 글들은 이야기/역사, 허위/사실 등의 이분법을 도치시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리주의의 허위를 드러내고 진정한 차이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자서전의 난무를 경계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닉 여성문학은 에스닉 여성의 개별적 말하기/글쓰기 체험을 통해 담론의 균질화와 체계화를 탈피하는 한 방책이 될 수 있음은 매우 분명하다. 말하자면 에스닉 여성의 글쓰기는 갇혀지고 숨겨진 서사를 끄집어내어 국가라는 가상의 공동체와 연관된, 동종적이고 수평적인 서사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IV.
발표자가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문제는 명확히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이론은 아니어도 이와 관련된 저서 내지는 번역이 출간되어도 이에 대한 논의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만큼 국내의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러 연구를 보다 심화, 파급시키는데 제동을 거는 요인이다. 논의의 부족은 각 학문 분야에 걸쳐진 페미니즘 연구자끼리의 의사소통의 결여와 페미니즘을 여성연구자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국내학계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가 번역 출간된 후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간략하게 소개된 사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피박의 '말걸기'는 하위층을 향한 실천 뿐 아니라 학자들간의 의사소통도 포함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우에노 치즈코.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박종철 출판사. 1999. 일레인 김, 최정무 편저.『위험한 여성』박은미 옮김. 삼인. 2001. 태혜숙. 『탈식민주의페미니즘』여이연, 2001. Aijaz Ahmad. In Theory: Classes, Nations, Literatures. London, New York: Verso, 1992. Gayatri Spivak. "French Feminism in an International Frame" Yale French Studies 62. 1981. Reprinted in In Other Worlds: Essays in Cultural Politics. New York and London: Methuen, 1987, pp. 134-53. Julia Kristeva. "About Chinese Women," Feminist Literary Criticism, Ed. by Mary Eagleton. London&New York: Longman, 1991, pp. 70-83. Kingston, Maxine Hong. The Woman Warrior. New York: Vintage International, 1989. Mohanty, Chandra Talpade. "Under Western Eyes: Feminist Scholarship and Colonial Discourses." Colonial Discourse and Post-colonial Theory: A Reader. Eds. by Williams Patrick and Laura Chrisman. New York: Columbia UP, 1994, 196-221. Morrison, Toni. Beloved. New York: Alfred Knopf, 1987. Suleri, Sara. "Woman Skin Deep: Feminism and the Postcolonial Condition." Colonial Discourse and Post-colonial Theory: A Reader. Eds. by Williams Patrick and Laura Chrisman. New York: Columbia UP, 1994, 244-256. Trinh T Minh-ha. Woman, Native, Other: Writing Postcoloniality and Feminism. Bloomington: Indiana UP. 1989.
토의문
1. 이미 탈식민 담론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문제점과 두 담론간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몇몇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구체적 검증이나 분석없이 탈식민의 개념과 '젠더'가 결합할 때, 위험부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사라 술레리(Sara Suleri)에 의하면, 탈식민 담론의 원래 의미는 특정 지역의 식민지화라는 역사 사실에서 결과된 담론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지나치게 추상화된 나머지, 주변부를 재정의하는 전략상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탈식민의 개념은 페미니즘 담론을 위한 전제 알레고리로 기능하여, 그 역사적 구체성을 박탈당한다. 다시 말하면 페미니즘담론의 문맥 속에서 탈식민주의는 국가와 인종의 역사성과 상관없이 부유하는 메타포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찬드라 탈피드 모한티 역시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낙천적 친밀감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여성'하면 모두 억압당하는 그룹으로 묶이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럴 경우 특정 역사를 지닌 개별 여성의 물질적 리얼리티는 잊혀진 채, 여성은 모두 억압받는 그룹으로 동질화된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모두 남성 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의존자이며, 결혼한 여성은 식민지배의 희생자로 가설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사회와 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여성 현실이 설명될 수 없다.
2.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선 나라는 개인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할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하나의 여성이자 한국민이며, 부산시민이며, 중상층 계층이며, 황인종이며 그 밖의 수많은 차이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성의 집합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질문자가 말한 대로 무수한 집합을 상정하는 여성, 민족, 인종, 시민, 계급의 층위로 구성된 나는 더 이상 개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 중의 어느 단일 카테고리로도 특권화되거나 본질화될 수 없고 환원될 수도 없다. 다시 말하면, 나는 관계성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모든 차이를 인정하는, 무관심의 극단적 복수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문이나 배타적 지역성에서 비롯되는 지역 감정처럼 존재하지 말아야하는데 존재하고 있는 차이들과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해야할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누에 치즈코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내가 관계성의 집합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소위 '세계시민'이나 '국민', 혹은 '인간'과 같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리가 주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 원리들은 나 자신이 귀속되어 있는 그 무수한 차이와 혼종적 집합을 망각하고 나 자신이 자유로운 하나의 '개인'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하여 마치 역사에서 부담할 짐이나 빚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젠더, 계급, 인종, 지역, 시민권 등의 차이가 개인에서 교차하는 가운데 유사성을 지닌 집합이 발생하게 되면 이 집합은 의견의 합일을 이루어 나가게 될 것이다. 결국 소문자 여성은 대문자 여성이 간과한 차이들을 점검하는 작업을 의미할 것이다.
3. 제3 세계 페미니즘의 과제라면, 먼저 지역성의 담론화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토착 여성의 삶을 재현하고 이를 담론화하는 문제와 이 속에서 식민주의와 근대화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의 접점에서 수행되어야할 것이다. 여기에서 스피박의 말걸기 개념은 앞서 얘기했듯이 유효할 수 있다. 윤리적 책임의식을 지닌 지식인 여성들이 여성 하위 주체들을 역사의 주체로 이해하고 이들에게 말거는 작업을 통해 이들을 재현해내는 것이다. 두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점은, 태혜숙도 지적했듯이, 저항적 대립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다시 읽는 작업이 한국에서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작업에 요구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런 기록들은 탈식민화 운동의 남성주의적 초점이 여성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사실을 확인시킬 수 있다. 셋째,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이 민족주의 관점에서의 젠더와 국가의 일치를 탈자연화시키는 것이라면, 국내에서의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은 당연히 타자로서의 우리를 투사시키는 한국의 러시아 여성, 필립핀 여성, 제3 세계 외국 여성 노동자들의 여성 문제에도 관심을 돌려야할 것이다. 이는 한국이 제3 세계국가로서만이 아닌 꼬마 제국주의의 면모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는 내적 성찰에서 비롯할 것이다.
1) ) 그러나 탈식민페미니즘(postcolonial feminism)이 모두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페미니즘 자체가 복수적인 데다가, 더 나아가 접두사 "postcolonial"이라는 용어가 다층적 의미를 지닌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탈식민페미니즘의 이해에 다가서려면, 무엇보다도 다양한 입장을 함축한"postcolonialism"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제국은 되받아 쓴다』(The Empire Writes Back)의 공동 저자인 애쉬크로프트와 티핀 등이 포스트와 식민주의 사이에 연자 부호를 넣음으로써(post-colonialism) '저항'의 개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이미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왕철. 「탈식민주의 담론과 남아프리카 문학」.『현대영미소설』, 제7권 1호(2000) 참조). Postcolonialism은 국내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포스트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등으로 번역되어 왔다. 릴라 간디(Leela Gandhi)의 postcolonial theory: a critical introduction은 국내에서 『포스트 식민주의란 무엇인가?』로 번역되어 소개된 대표적 사례이다. 역자는 '포스트'가 '탈'의 의미보다는 식민 후의 정황을 그 자체로 지시하는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스트'를 채택했다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210). 그러나 포스트 식민주의가 식민지 이후라는 시간의 의미만을 함의할 경우, 이 속에 서구의 진화론적 역사관이 개재하고 있음을 릴라 간디는 지적한다. 이는 앤 맥클린토크의 주장과도 일치하는데, 즉, '포스트 식민주의'라는 용어에는 단선적 시간의 원칙과 이 시간관에 함축된 '발전'이라는 관념을 확약하고 있다는 혐의가 늘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McClintock 2). 따라서 이 같은 포스트의 의미가 postcolonial feminism에도 적용되어 포스트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에는 의문이 생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식민주의의 억압은 역사적으로 늘 존재해 왔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내포된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보다는 탈식민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로 국내에서 번역되었다. 이는 여전히 혹은 더욱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는 식민성의 극복을 지향한다는 탈식민주의 담론의 특징을 보다 부각시킨 번역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탈식민의 "탈"은 저항과 시간 개념을 모두 함유한 의미로 이해되길 바란다.
2) 이 사실은 그의 대표적 논문의 하나인 「국제적 틀에서의 불란서 페미니즘」(French Feminism in an International Frame)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논문은 제1 세계 페미니스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중국 여성에 관하여』(About Chinese Women)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서, 스피박의 탈식민주의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이 명확하게 포착되는 대표적 논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3) 이와 유사한 사례로 작년 영미문학 페미니즘 국제학술대회에서의 한 미국 발표자의 예를 들 수 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그는 미국 내 한국계 이민들과 맺었던 친교를 통해 한국 사회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한국의 여성문제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어왔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녀의 출생비율은 세계 최하이고 이혼율은 세계 3위로 높아졌다. 발표자는 한국의 변화에 대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한국은 여전히 시어머니 밑에서 억눌려 살아야하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라는 인식만을 지니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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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vak, Arundhati Roy, Susan Sontag, Wendy Doniger, Onda riku ... by spiderl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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